비난이 아닌 비판 항상, 서울 - 2017


2017/05/20

언젠가 한국인의 걸음거리와 관련된 글을 프랑스인의 그것과 비교해서 이글루스에 쓴 적이 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의 댓글을 받았는데 대부분은 '한국에 대해 그리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라'라는 일침과 같은 글이었다.
나는 놀랐다. 물론 내 글의 문제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안그러면 2015년부터 일어난 금수저, 은수저, 헬조선 논란에 뛰어든 수많은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내 글을 보고 분노할 수 있었겠는가. 나와 같은 생각을 나누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난, 지금도 또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의 많은 부분이 불편하고 싫다.
굳이 내 유년 시절까지 들먹이며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난 타고났는지 모르겠는 천성에 한국인 성향 혐오증이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나도 여기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종종 드러나는 천박한 자본주의 습성이 있고, 이를 볼 때마다 스스로를 혐오하게 되는 것도 맞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놀지 않으면 따돌림 당하는 또래 집단 문화, 남들이 다 좋다고 할 때 좋다고 하지 않으면 멍청이 취급을 당하고, 다 싫다고 할 때 좋다고 하면 괴짜 취급을 당하는 곳. 그리고 이런 문화는 성인까지도 이어진다.
이게 한국에만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다. 난 외국에서 자라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살았기 때문이 이 문화를 내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이야기하는 것은 나의 자유고, 나는 충분히 그럴만한 권리가 있다.
한국인들은 재미나다. 비판하는 것을 싫어한다. 단, 앞에서. 그리고 뒤에서는 비난하고, 힐난한다. 남 탓을 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어쩌다 한국 사회가 이렇게 되었는지 나는 알 턱이 없다. 그 때 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책으로 읽는 텍스트들은 나에게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간접 경험 정도이지, 거기서 더 나아갈 수 없다. 지금 내 경험을 남들이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나는 홍준표와 친구들을 믿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욕할 수 없다. 하지만 내 기준에서 그것은 바른 행위가 아니며, 삶에서 도피하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문재인을 지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한국의 대통령인 그를 믿고 지지하는 것밖에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내가 여기에 이바지하겠다고 정계에 뛰어드는 열정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그와 믿는 바가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더 나은 한국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후보를 올렸던 문재인과 제발 내가 이민가고 싶은 마음을 줄일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램의 공통 분모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10일 남짓 되었지만 그는 잘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절대로 중간에 평가는 할 수 없다. 임기가 끝나고 그리고 그 후 몇 년이 지나서야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비전이 실현되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불행히도 그런 대통령이 몇 있지 않았고, 심지어 직전에는 정말 '인수인계할 자료가 몇 개 없는, 파쇄기 수백대를 임기 마무리 전에 사드린' 정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난 한국과는 애증의 관계다. 모든 분야에서 애와 증이 얽히고 섥혀 나타난다. 어떤 것과 관련해서 이 부분은 좋은데 저 부분은 싫고 이런 양상이다.
하지만 프랑스와는 애 혹은 증의 관계만 있다. 내가 속해있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 저건 정말 좋았는데.' 혹은 '정말 저건 아니었는데.'의 두 가지 사건으로만 나뉜다.
내가 원하는 대로 프랑스에서 일자리를 구해 근무하게 된다면, 특히나 내가 지금 공부하는 것과 관련해서 그 나라에서 살게 되었을 때 내가 이 소위 유럽 짱깨라고 불릐는 나라가 어떤지 조금 더 주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럼 그 때는 나는 또 여기에 프랑스가 왜 거지같은지를 서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중동과 같이 여성 권리가 억압되지 않은 나라이며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짓는 혁명의 나라(사실 난 프랑스 혁명의 판타지를 믿지 않는다.) 이미지와는 다르게, 파리에 있을 때 나 혼자 살았던 때와 남자친구와 함께 거리를 거닐었을 때 차이를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다. 사랑의 열병으로 눈이 어떻게 된 것이라고? 아니다. 실제로 안전함의 차이는 많이 났다. 
한국은 일상적엔 곳에 여성 혐오와 폭력이 난무한다. 그것이 실질적인 폭력과 폭언으로 이어지든, 사소한 장난같은 말이지만 상처를 주는 방식이든 말이다. 그런데 요새는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 한국에서도 내가 맞아 죽을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난 한국을 200% 싫어하지 않는다.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내 부모님, 내 동생, 내 친구들이 사는 나라, 너무 좋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인데 왜 가끔 이따위로밖에 돌아갈 수 없는지 분노하기도 한다. 그리고 더 나아지도록 내가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지도교수님과 대선 전에 식사를 하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절대로 실재계로 갈 수 없는 상징계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결국 오브제 쁘띠 아(objet petit a; Lacan의 개념이다.)를 찾지 못하고, 항상 이것이 부족한 채로 살아간다. 그리고 뭔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일종의 판타지로 이를 가지고 살아간다. 항상 판타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 판타지는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모두 표현한다.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대선 후보가 바뀐다고 나의 삶이 어마무시하게 달라질까? 이렇게 말하면 욕할 사람들이 많을 것도 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엄청나게 내 삶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서운 것은 내가 살아가는 일상에 조용조용히 침투해서 마치 그것이 진짜인 것처럼 나를 속여오는 방식이다.
내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어느정도 안정된 나의 세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무너진다면 나도 조용히 앉아 책상에서 글쓰고 앉아있을 시간이 어디있겠는가. 빨리 나가서 살아내야지.

한국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직도 전쟁 이후 박정희 시대에 머물러있는 것 같다.
비판을 받아들여야 한다. 비난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 안에는 다른 함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를 점점 줄여나갈 수도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화를 내기보단 조용히 들어보고 사유해야 한다.
고든 램지는 FOX 채널에서 운영하는 <키친 나이트메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직언으로 유명한 요리사인데, 
그가 방문한 모든 음식점의 주인들은 대다수가 자신의 요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요리는 식당의 핵심인데 이게 부정되는 순간 그들이 해온 모든 행위가 부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잘 운영되지 않는 식당의 운영자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램지의 직언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주인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결론은 뚜렷히 나뉜다.
쓴 소리를 듣겠다고? 말만 하지 말고, 듣고 무시하지 말고, 고쳐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소위 엘리트라 불릐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전면의 전문가들을 우리가 밀어 붙여야 한다.
요구하고, 불편한 것을 드러내고, 화를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일단 참여 정부 비스무리한게 등장하기는 했으니 한 번 시도 해봐야 한다. 무얼 해도 거울 공주때보다는 최소한 낫지 않겠냐는 헛된 희망이라도 좋으니 일단 시도는 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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