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 서양 좌파가 말하는 한국 정치(Democracy delayed) Des petits idées



전 이코노미스트 기자이자 이태원 더 부스 The Booth 맥주집 주인인 영국 출신 다니엘 튜더가 쓴 책이다.
뭔가 번역된 글이 아니라 한국에 오래 있었던 외신 기자가 쓴 글이 문학동네에서 나왔다는 것도 놀라웠다.
제목도 좋고, 서양 좌파라고 이름을 굳이 붙인 이유는 한국과 영국(으로 대표되는 서양; 저자 기준)에서 정당을 나누는 기준인 좌와 우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명명한 것이 아닌가 싶다.

튜더는 한국에서는 정치가 일종의 종교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유권자 감정에 소구하는 것이 더 쉽고,
유권자 스스로도 이러한 사고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어 기존 정치의 의미가 퇴색되고, 민주주의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쳐 국민 불신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는 음모론이 판치게 되는데, 음모론은 국가를 의심하며 제정신 차리고 돌아가게 도와주는 역할이 아니라 국민을 더욱 우매하게 만드는 덫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왜 한국에서는 정치 혹은 정치인의 좋고 긍정적인 부분을 다루는 뉴스는 거의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경제 전문가로 활동했었고, 은행, 증권사 같은 사기업에서 일했던 외국 사람이 의문을 품는 부분에 대해 나는 정작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도 부끄러웠다.
당연히 정부와 정치는 비판받아야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언론 프레이밍과 의제 설정으로 인해 자연스레 이데올로기적 사상이 내재화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최악의 정치인을 상정하는 것은 정치인을 망치는 데 일조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 말은 사실이다.

이어서 튜더는 부족주의 정치판과 인물 위주의 한국 정치를 비판하며, 어떻게 이 나라에는 역사와 논조가 꾸준히 누적되온 정당이 하나 없는지 되묻는다. 그리고 한국인인 나로서는 마땅히 할 대답이 없었다. 각 당의 대표 정책조차 모르는 내가 한 정당을 지지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당의 대선 후보와 국회의원을 지지할 수 있는지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한 번 깔끔하게 정리해봐야겠다는 다짐까지 이어지게 만들었다.

나는 특이하게 외신 기자, 외국에서 파견되 한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이 사람들은 내가 절대로 알 수 없는 혹은 알아도 모른 척하고 지나갔던, 무시하고 지나갔던,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갔던 다양한 시각들을 제공해주고, 나는 이를 통해 시선을 확장시킬 수 있다.
영국 출신인 튜더에게 '너네 나라나 제대로 분석해라'라고 단순한 비난을 할 수 없고, 할 필요성도 못느끼는 것은 바로 그 이유이다.
외신 기자든, 그냥 일하는 외국인이든, 타인의 시선을 통해 보는 내 나라의 모습은 나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나 역시도 웬만해서는 한국에 관해 긍정적인 논조를 가지고 있는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시선에서는 쿡 찌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한국에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하고, 이들처럼 쿡 찌르지 않더라도 고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발전을 불러오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좋은 책 읽었다.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튜더의 다른 저서도 읽어봐야겠다.

아래는 역시나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 문구들을 소개한다.


#1.
'유아적인' 정치문화는 민주주의에 해롭다. 당장 유권자의 표를 얻으려고 끝없는 경제적 혜택과 감세를 공약으로 내세우는 미국과 영국 정치인들의 근시안적인 행태는 '유아적'이라고 표현할 만하다. 한국에서는 이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국 정치인들 역시 유아적인 측면이 있다. 그들은 유권자를 어린아이처럼 대한다. ... ... 개인적으로 유아적 정치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문구라고 생각한다. 현구막 등 선거 홍보물에 '희망', '꿈', '소통', '미래'와 같은 말들이 사방천지에 도배되는 모습이 항상 놀라웠다.

#2.
한 번은 필자가 TV조선의 박근혜 보도를 비판하는 트윗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후 증오에 가득 찬 쪽지 몇 개를 받았다. ... ... 그 쪽지를 받은 사람은 이를 박근혜에 대한 비판으로 생각했다. 박근혜에 대한 비판은 한국에 대한 비판이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한국을 비판한 사람은 좌파라고 규정한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한국 정치, 언론,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는 내러티브를 반영한다. 비판하는 사람들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는 비민주적 담론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의견을 표출하는 사람은 민주주의 신봉자가 아니라 독재를 옹호하는 자가 된다.

#3.
2011년 국제 언론감시단체인 프리덤하우스는 한국을 '언론 자유국'에서 '부분적 언론 자유국'으로 하향 조정했다. 공식적인 검열 증가, 언론에 영향을 행사하려는 정부의 입김, 언론인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대통령의 측근을 주요 언론사 고위 보직에 앉힌 결과였다.... ...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 ... 프리덤항스 2014년 연간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언론 자유도가 10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결과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민주주의가 전반적으로 침체를 겪고 있는 추세를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권위주의가 점점 더 만연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오늘날 반 독재자들은 무식하게 탱크를 앞세우는 대신 언론을 이용해 교묘하게 통치하는 방법을 터득해가고 있다.

#4.
한국이라는 환경에서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진보 언론은 정부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의 성향을 강화시킬 뿐이다. 이대로는 KBS 뉴스처럼 미묘하게 편향된 주류 언론에 영향을 받는 중도 유권자층을 설득할 수 없다. 정말 효과적인 정부 비판 언론이 되려면 진보적이되 합리적인 관점에서 때로는 정부를 칭찬할 줄도 알아야 한다. 또한 건강, 생활, 음식 같은 주제처럼 비정치적인 '소프트'한 내용도 보강해야 한다. 지적이면서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미디어를 지향해야 한다.

#5. 
영웅주의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한다. 영웅시된 정치인 개인에게 책임을 요구할 근거가 빈약할 뿐 아니라 정치인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지향하는 정책이 무엇인지보다는 인물 자체나 부풀려진 비현실적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나 논의 등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만다. 영웅이 정당정치 위에 존재하므로 정당마저 뒤로 미렬난다. 안타깝게도 이 일련의 과정은 영웅이 아닌 대중 스스로 주도한다.

#6.
단지 나와 적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김어준 또는 그 누구라도 완벽하길 기대하지는 마라.

#7.
한 가지 이슈에 열을 올리다가 금세 새로운 주제로 옮겨가는 한국 여론의 냄비 현상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 ... 하지만 이런 냄비 현상이 정치문화에는 분명 악영향을 끼친다. 지독한 부패를 저지르고 의원직까지 박탈당해놓고도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데로 옮겨가 악행이 잊히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뻔뻔하게 다시 얼굴을 내미는 한국 정치인들이 어디 한둘인가.

#8.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로저 코언은 음모론을 "힘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피난처"라고 표현했다.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고 자신의 삶에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모든 문제가 정보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잘못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탓하는 경향을 보인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이 정확한 정보에서 소외되고 스스로의 삶에 대한 자율성도 확보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만은 확실해보인다.

#9.
영국 노동당 국회의원 글로리아 드 피에로는 정치인이라면 무조건 질색하는 현실에 분노를 느꼈다. ... ... 결국 그는 이 문제에 대한 여론을 조성하고 그토록 정치인을 혐오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보고자 토론 그룹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 ... 그는 영국 유력 일간지 가디언에 "조사 결과, TV에서 정치인이 다뤄지는 방식이 문제라고 밝혔다.

#10.
한국 좌파는 외신기자와 인터뷰할 때 통계나 경제이론을 인용하거나, 차분하고 합리적인 어조로 전경련 같은 조직이 내세우는 주장의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지 못한다. 대신 삼성이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데 아직도 빈곤층이 많은 것은 부당하며, 정부는 소수 특권층인 최상위 1%의 이익만을 대변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 ... 반면 한국 우파는 어떻게 포장해야 영미권에 어필할 수 있는지 잘 파악하고 있다.

#11.
386 아저씨에 의한, 386 아저씨를 위한 정치

#12.
제조업은 한국의 미래다. ... ... 이제 한국은 영미식 모델을 따르기보다 스위스나 독일의 사례를 검토해 새로운 정책을 도출하고 시행해야 한다. 이를 가능케 할 추진력과 지혜가 있는 정치인이라면 다음 세대에 영웅이 될 것이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