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서 나를 보다. 항상, 서울 - 2017


2017/05/14

벌써 남자친구를 만난 지도 4년이 다되간다. 2013년 7월 25일에 만났으니 두 달 정도 뒤면 정확히 4년이 된다.
만난지가 오래되서 기억을 조작하기 시작했는지 마치 나는 처음부터 엄청나게 조용하고 고급진 연애를 해온 것처럼 말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근데 실제로는 만난지 6개월 후부터 엄청난 문제들이 있었다.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전혀 사소하지 않았던 문제들로, 지금 생각해보면 뜨아 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중요치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감정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나는 0.1mm라도 다르기 때문에 느끼는 온도차도 있겠고, 상황적으로 그 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이유도 있겠다.
생각해보면 정말 엄청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다. 마음 먹기 한끗차로 모든 분노와 소리침을 다 무효화할 수 있으면서도 그보다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킬만 했던 일들이다.
그럼 나는 그 때 미숙했나? 지금의 나는 성숙한가? 절대로 단언할 수 없다.
그냥 그 때는 중요했고, 지금은 덜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일련의 사건을 가장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말이다.

에바 일루즈의 <사랑의 사회학>을 읽었을 때 그 텍스트 자체가 옳고 그르고의 문제와는 다르게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의 문제에 대해 읽게 되었다는 점에서 나름의 깨우침(?) 혹은 일종의 깨달음(!)을 얻었다.
종교에서 비롯된 도덕과 일치하는 감정을 선호하던 사회와는 다르게 지금의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감정이란 어느 나라나 다 똑같이 느끼는 것이고, 그 양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감정을 그렇게 퉁치지 않아야 하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분명히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맞다. 고귀한 존재로 남성만 인정이 됐던 그리스 시대에 남성과의 사랑이 지금처럼 욕먹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고, 나를 배신한 여성에게 배반과 분노의 감정이 아닌 고귀한 도덕심을 가지지 못해 안쓰러운 사람이라는 불쌍함의 감정을 가지던 18세기의 사랑도 사실이다. 모두 다 현존했던 사랑의 '감정'이다.

그럼 나는 이 사람과의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당연하게도 나는 '지금의 결혼과 구분된 연애관 + 외적/성적 매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까 종종 결혼하기 싫다고 하면서도 이 친구와 미래는 어떻게 될지 고민하고, 가끔은 괴롭히고, 정확한 답을 내놓으라고 했다가, 다시 한 번 결혼하기 싫다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종종 다른 사람과의 사랑을 꿈꾸기도 하면서, 이 사람을 놓치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을 겪는다.
그리고 저 사람에게는 내가 제격이며,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악담아닌 악담을 퍼부었고, 지금도 종종 속으로 '나정도면 나쁘지 않지!'라며 스스로의 인정 욕구를 채우고는 한다.

사람들은 종종 내가 정말 편하게 생각하고 산다고 말하는데, 아마도 이러한 인정 욕구를 외부에서 찾지 않고 내 스스로 채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인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여전하다. 단지 남의 시선에 집착하지 않을뿐, 내가 스스로에게 인정의 감정을 채울 수 없을 때 나도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공부를 하고(똑똑한 여성이라는 스스로의 자부심을 잃지 않기 위해), 운동을 하고(똑똑한데 몸 관리도 잘 하고, 건강도 좋은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기 위해), 몸 치장에 신경쓴다.(똑똑하고, 몸도 관리 잘하고 옷도 잘 입는 사람에 대한 욕망)
결국 더 안좋게 보면 타인의 시선을 극적으로 내재화해, 푸코가 말한 감시의 판옵티콘을 내부에 스스로 세움으로써, 적극적으로 시선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난 이게 나쁘다고 얘기하고 싶지 않다. 내 나름대로 삶의 균형을 찾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항상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되려 남들이 말하는 그 기준에서 자유롭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남들은 똑똑하고, 얼굴도 나쁘지 않고, 피부도 하얗고, 잘 꾸미고, 학력도 나쁘지 않고, 한 사람을 꾸준히 만나고 있으며(인스턴트 사랑이 넘치는 현재 긴 기간의 사랑은 일종의 도덕으로 여겨진다), 부모의 재력도 있고, 나름대로 나의 삶을 추구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계속해서 이 기준들에 합치하기 위해 노력해오고 있다.
그래서 내가 종종 외국으로 가고싶어 하는 이유는, 이런 한국 사회들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나는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환경이 바뀌면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바가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
내가 남자친구를 높이 사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주장하고 그걸 보여주려고 하는 끈질김(그러면서 기존 이데올로기를 과도하게 비판하고는 하는데, 이는 현실에서 살아야 하는 입장에서 그다지 개인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은 아니다. 한 개인이 이데올로기를 부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다수가 모이면 가능하겠지만.)은 종종 내가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을 불러오고, 그와 함께함으로써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너 역시도 그와 같은 사람일 것이다. 라는 일종의 추론)을 고의적으로 느끼길 바라는 것일지도 보른다.

이 모든 것을 막론하고도 내가 이 친구를 만나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억지로라도 모든 말을 할 수 있고, 느끼는 바를 숨기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내 부모보다 되려 사실대로 내가 느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이러한 사항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그리고 설사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너무 넓은 세상 속에서 내가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놓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정의하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그에게서 기존 이데올로기적 사랑을 느낄 때만 유지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그래서 내가 이런 이데올로기를 신랄하게 비판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도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이면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는 일종의 판타지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내 남자친구가 편안하고,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면에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외모, 집안, 성격 등 사회에서 긍정성을 띌 수 있는 요소들을 그 사람이 가졌기 때문에 애정이 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갑자기, 내 창피한 부분을 아주 많이 알고 있는 남자친구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가 숨긴 이면을 알고 있는 나도 생각이 났다.
우리는 나름대로 이 사회 안에서 이상적이라고 생각되는 연인 관계를 만들어가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근데 그게 안될 경우 우리는 헤어질 것이고, 다시 이상을 추구하며 다른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평생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허구적 상상 속에서 살아갈 것이고, 평생이 아니더라도 잠시라도 그 상상 속에 살아갈 것이다.
실재계과 상징계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우리는 평생 상징계에 머무르기 때문에 진짜 réel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그 상징계 속에서 주는 허구적 상상은, 우리를 좌절시키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동력을 준다는 사실도 부정하기는 어렵다.
나와 그가 허구적 상상에 기반한 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칭할 수는 없다.
어차피 상징 속에서 살아가는 지금 모든 것은 내 상상인데, 그 상상에서 최상의 것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안쓰러운 노력이 무시당하면 그건 정말 너무 허무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단상 끝.

덧글

  • 물고기 2017/05/14 20:01 # 답글

    너무나 공감되는 글이에요... 저는 2013년 8월에 사겨서.. 곧 4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SJ님이 제 생각을 글로 써주신것 같은 느낌이들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 2017/05/18 14:1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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